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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숙청 - 드골의 나치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

프랑스의 대숙청 - 드골의 나치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
1. 페탱 비시정부와 드골 자유프랑스

나치 독일군이 1940년 5월 10일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5월 15일 네덜란드, 5월 28일 벨기에가 히틀러에게 항복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피해 벨기에와 접한 서부 전선을 돌파해 프랑스를 동서로 가로질러 진격했다. 영·불·캐나다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포위당하며 위기를 맞았다. 5월 29일부터 6월 4일까지 덩케르크 대철수작전으로 연합군 34만여 명은 영국으로 철수했다. 6만 8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뒤였다.

6월 16일 밤 레이노 정부가 총사직하며 부총리였던 필립 페탱 장군은 나치독일에 휴전을 제의했다. 페탱은 6월 17일 낮 12시 30분 라디오 연설을 통해 프랑스군은 전투를 중지하라고 했다. 영국에 있던 드골은 6월 18일 끝까지 저항하자는 연설을 BBC를 통해 내보냈지만 이미 늦었다. 6월 22일 독일과 프랑스는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1918년 휴전 협정에 서명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철도마차를 타고 독일이 항복했던 콩피에뉴 숲에서 이루어졌다. 르와르강 북부의 프랑스(국토의 55%)는 나치독일이 직접 점령하고 남부 프랑스는 온천으로 유명한 중부 휴양도시 비시에 페탱을 중심으로 한 휴전파가 정부를 만들어 통치하게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창설했다. 프랑스는 반나치 저항운동을 지휘하며 연합군과 함께 세계대전에 참전한 자유프랑스와 나치와 협력하는 비시정부로 나뉘게 되었다.


2. 북아프리카 군부숙청과 파리 해방

영국에 망명한 드골은 프랑스 본토에 반나치 저항단체를 만들어 프랑스 해방의 날에 대비했다. 드골은 자유프랑스와 본토 반나치 저항운동의 최고지도자였지만 국제적 지위는 취약했다. 미국은 비시정부와 전략적으로 외교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1942년 11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자 나치의 공세가 수세로 변했고 독일은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다. 드골은 자유프랑스를 북아프리카로 옮기기로 했다. 비시정부의 정통성을 빼앗고 본토의 저항운동을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1943년 5월 15일 반나치 저항단체, 정당, 노동조합 등 애국 세력이 결성한 '저항운동 국민협의회(CNR)'가 드골을 지지한다는 첫 성명을 냈다. 이에 힘입은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6월 3일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 총사령관인 지로와 함께 '민족해방 프랑스위원회(CFLN)'를 공식 출범시켰다. 나치독일과 비시정권에 대항하는 새로운 프랑스 망명정부였다. CFLN은 파리 해방 후 드골이 첫 국가원수가 되는 프랑스 임시정부로 발전한다.

비시정권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지로와의 권력투쟁에서 우위를 점한 드골은 1943년 8월 10일 처음으로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숙청방침을 발표했다. 비시정권의 직접 가담자와 지지세력 및 나치독일에 협력한 자에게 가차 없는 징벌을 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나치협력 민족반역 범죄자는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공직자들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 사람들(23)"이라며 모두 국가반역죄로 숙청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로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드골은 CFLN을 통해 1943년 9월 3일 비시정부의 최고지도자 페탱을 민족반역자로 재판에 회부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CFLN 숙청위원회도 프랑스의 대숙청을 위한 민족반역자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 숙청대상자로 비시정부의 전 내무장관 퓌슈를 지목하며 대숙청은 프랑스 해방 1년 전에 시작되었다. 퓌슈는 재판을 거쳐 1944년 3월 22일 알제리 형장에서 처형했다. 그 뒤 북아프리카전선에서 나치독일에 협력한 프랑스군부를 숙청했다.

1944년 6월 5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파리를 향해 진격했다. 파리의 반나치 저항단체는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독일 점령군과 전투를 벌여 프랑스를 해방하기 시작했다. 저항운동세력은 나치와 싸우며 프랑스를 해방시켜 연합군 군정실시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8월 24일 파리 해방이 공식화되었고, 드골은 8월 26일 샹젤리제 대로를 행진했다. 드골의 임시정부는 나치독일로부터 해방되는 지역마다 나치협력자 숙청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반역자들 재판은 계속됐다.


3. 제일 먼저 반역 언론을 숙청하다

파리의 숙청재판정에 가장 먼저 끌려 나온 피고들은 나치협력 언론인들이었다. 나치독일과 비시정권을 찬양한 사설과 칼럼이 민족반역 행위의 증거로 쉽게 수집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나팔수가 되어 자신들이 쓴 글이 부메랑이 되어 심판을 받게 됐다.

드골은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했다(50)"고 밝혔다. 최초로 재판정에 선 나치협력 반역자는 비시정권 일간지 〈오늘〉의 정치부장이었던 조르주 쉬아레즈였다. 나치선전의 선봉에 섰던 반역언론인은 1944년 11월 9일 새벽 총살형으로 54세의 삶을 마감했다.

1944년 12월 26일 발표한 부역죄는 형을 선고받은 모든 나치협력자에게 소급되어 적용되었다. 부역죄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및 공직 진출권이 박탈되며, 공무원, 군, 변호사, 회계사, 교원, 노동조합원, 언론인과 모든 통신과 정보업무에서 추방되고 심지어는 개인기업의 사장은 물론이고 이사진에서도 제외(55)"되었다. 드골은 나치협력 언론인을 제일 먼저 민족반역자의 심판대에 올림으로써 반역자 대숙청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웠다.


4. 민족반역자 페탱과 파시스트 총리 라발 그리고 공직자 대숙청

1944년 9월 12일 임시정부는 페탱과 비시정부 각료들에게 체포명령을 내렸다. 나치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어 프랑스를 구했다는 여론과 화해를 선호하는 흐름도 있었다. 페탱파는 드골이 준비한 숙청을 피하려고 화해도 시도했다. 드골은 "페탱의 비시정부는 불법정부다. 왜냐하면 페탱이 민족의 전체 이익을 배반했기 때문이다(112)"라고 선언했다. 1945년 7월 23일 페탱의 역사적 재판이 개정했다. 1945년 8월 1일 오후 라발 전 총리를 체포한 군용기도 착륙했다.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며 2차 대전에서 프랑스를 보호했다고 주장한 페탱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되어 1945년 11월 14일 일드외 섬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5년 8개월간의 감옥생활 후 1951년 7월 23일 이 섬에서 95세로 생을 마감했다. 페탱파는 다시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하게 됐다.

비시정부를 히틀러에게 팔아먹기 위해 광분한 민족반역자 라발에게 1945년 10월 13일 사형을 선고했다. 10월 15일 새벽 라발은 총살형을 피하려고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2시간에 걸쳐 위를 세척한 라발은 프랑스의 반나치 저항운동가를 처형했던 프렌 감옥 뒤쪽 사형대에 세워졌다. 최후까지 독설을 내뱉은 라발을 낮 12시 30분에 총살형으로 심판했다.

1945년 10월 21일 총선 후 제헌의회에서 임시정부 첫 대통령으로 드골이 선출되었다. 파리 해방 후 3년간 비시 지도층 숙청은 거의 모두 심판했다. 비시정부에서 경찰총수를 지낸 부스케는 1991년 3월 반인류 범죄로 기소돼 재판받던 중 1993년 6월 8일 암살 당했다. 최고재판소는 1960년 비시정권 각료 아벨 보나르의 재판을 끝으로 비시정권에서 나치에 협력한 반역자에 대한 심판을 끝냈다. 모두 108건의 나치협력 민족반역사건을 다루어 사형 18명, 강제노동형이나 징역형 25명, 공민권 박탈형을 14명에게 선고했다. 그러나 고위공직자에 대한 응징은 언론인에 비해 관대했다.

드골이 선언한 비시정부에 대한 불법과 무효는 "상관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했더라도 처벌해야 한다(186)"는 의미였다. 고위 검사들은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물러나야 했다.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비시정권의 지시를 따른 검사는 좌천시켰다. 군부숙청위원회는 장군 253명에 대해 나치협력 여부를 조사했다. 회부된 장군들 가운데 40여 명만이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5. 나치협력 기업 숙청과 국유화

드골은 나치독일에 적극 협력하거나 지원한 대기업 사주들을 숙청하기로 했다. 반역 대기업 소유주의 재산을 몰수했고, 기업을 국유화했다. 민족반역 기업인을 말살하고 그들이 소유한 기업을 국유화하는 처벌을 내렸다. "국민 모두의 행복을 위해 개발하고 이용해야 한다(202)"며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사회주의정책을 선택했다.

모든 항공운수기업을 국유화했다. 사기업이었던 파리지하철은 해방 후 국영회사로 탈바꿈했다. 나치에 협력한 르노자동차공장에 대한 징발을 시작으로 르노그룹의 모든 회사를 몰수했다. 소유주와 측근들은 민족배반자로 구속했다. "대주주 루이 르노의 주식을 모두 몰수하며 나머지 주주들에게는 국가가 보상한다(209)"는 훈령을 내렸다.


6. 언론계 대숙청과 언론개혁

1944년 9월 30일 언론숙청에 대한 새로운 훈령을 발표했다. "나치의 파리 점령 이후(1940년 6월 25일) 창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 나치독일의 점령기간에 북부 프랑스에서 휴전 후 15일 이후에도 계속 발행한 모든 신문과 잡지들, 그리고 남부 프랑스에서 독일군이 점령한 1942년 11월 11일 이후 15일이 넘었는데도 계속 발행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222)"은 발매를 금지했다. 또한 소유주와 상층부에게 실형이 선고되면 바로 폐간했다. 나치독일 점령기간 신문을 발행한 언론사는 그 제호를 계속 달 수 없으며, 발행이 금지된 언론사의 건물과 시설은 물론 동산까지 사용할 수 없게 했다.

새 훈령은 9백여 개 신문과 잡지들에게 존폐의 충격을 주었고, 649개 언론사에 대한 압류조치를 낳았다. 언론계 대숙청은 나치협력 언론사들을 폐간시키며 새 언론을 창출하는 작업이었다. 규모가 큰 석간신문 〈르 탕〉지는 법원에 의해 압류당했고 〈르 몽드〉가 사옥을 점유하고 1944년 12월 18일 태어났다. 〈르 피가로〉는 비시정권 시절에 신문을 계속 발행했지만 저항운동에 깊숙이 참여해서 복간된 유일한 신문이었다.

1948년 말 모두 538개 언론사가 재판에 회부되어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고 모두 폐간됐다. 64개 사가 전 재산 몰수, 51개 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다. 2차대전 후 프랑스의 언론인과 언론사에 대한 대숙청은 나치협력 민족반역 언론을 거의 완전무결하게 청산한 보기 드문 전례가 됐다.


7. 지식인과 문화인 대숙청

출판인과 작가 등 지식인 숙청은 가혹하다는 불평이 쏟아졌지만 언론인보다 상당히 관대한 처분을 했다. 사상의 자유라는 저항작가들의 인식이 과오를 용서하는 방향으로 틀었기 때문이다. 연극과 영화계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협력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처벌이 되었다. 나치협력 작가들은 전체 회원 8백여 명 가운데 16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나치협력을 거부하거나 저항운동에 참가한 작가들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8. 정계 대숙청

파리가 나치독일군에 점령당한 후 비시에 소집된 상하원합동회의에서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한 의원들이 제일 먼저 반역자로 숙청했다. 드골의 훈령에 의해 569명의 찬성의원은 자동으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엄격한 심사로 구정치인은 33%로 줄어들었다. 비시정권에서 출세하고 나치독일에 붙어 치부한 사람들은 거의 우파였음을 고려하면 온건한 것이었다. 좌파 정당은 자체숙청을 했지만 우파 정당은 스스로 숙청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 21일 총선 후 제헌의회는 초선이 85%였고, 의원의 80%는 정열적으로 저항운동에 참여한 투사 출신이었다. 수백 명이 정치무대에서 추방됐고, 사형, 무기징역,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은 정치인이 상당수였다. 언론계와 함께 가장 혹독하게 숙청했다. 1958년 드골이 제5공화국을 창건한 후에도 저항운동 출신이 아니면 각료가 되기 힘들었다.


9. 얼마나 죽었나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나치가 패배하기 시작하면서 나치협력세력인 비시정권을 응징하는 작업이었다. 나치협력자들은 사회에서 종신 부역죄라는 형으로 정상 활동이 불가능했다. 피선거권과 투표권이 박탈당했다. 공직은 물론 언론이나 국영기업체 진출이 차단된 시민권 박탈자 신세였다. 드골은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1946년 1월 20일까지 반역자들에겐 염라대왕이었다.

1946년 4월 임시정부 법무장관은 숙청재판소가 108,338건을 취급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42,000건을 재판에 넘겼고, 나머지는 시민법정에 회부했다. 그때까지 사형선고 3,920명, 강제노동형 1,508명, 유기징역형을 8,500명에게 선고했다고 발표했다.

숙청재판소가 완전히 문을 닫은 후 발표한 최종 수치는 더 많았다. 최고재판소, 지방숙청재판소와 시민법정이 다룬 나치협력 사건은 124,751건에 달했다. 이중 사형선고를 6,763명(3,910명은 궐석재판)에게 내려 767명은 집행했고, 종신강제노동형 선고 2,777명, 유기강제노동형 10,434명, 유기징역형 24,116명, 금고 2,173명에게 선고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보다 숙청한 나치협력자는 더 많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페탱파는 105,000명 사망설을 주장한다. 프랑스 대숙청을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연구한 로베르 아롱은 총 사망자가 3만~4만 명이라고 했다. 드골은 회고록에서 10,842명이라고 기록했다. 전사편찬위원회는 프랑스 해방 후 즉결처분 사망자를 포함해서 9,901명이라고 제시했다.


10. 우리는

해방 후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강제해산 했다. 우리는 친일 반역세력을 단 한 명도 처단하지 못했다. 저자는 "언젠가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353)"고 지적했다. 12.3 내란으로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반역자를 대숙청해서 나라를 바로 세울 때다. 드골은 나치협력 언론인을 제일 먼저 숙청해서 대숙청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웠다. 드골의 언론 대숙청 선례가 시금석이다. 다시는 내란범과 내란 나팔수가 나타나지 않도록 엄혹한 대숙청이 필요하다. 대숙청으로 대통합하는 나라가 시대정신이다.

프랑스의 대숙청/주섭일/중심 19990429 356쪽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