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소설이다? 일러두기와 인터넷에 관한 짧은 생각

작년 여름, 김훈의 《남한산성》을 사놓고 이제나 읽을까 저제나 읽을까 잡았다 놨다 하던 차에 남한산성 일주를 하였다. 그리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본 덕분인지 소설 속 배경이 훤히 그려지며 단숨에 읽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닥본사였기에 《칼의 노래》가 원작이며, 탄핵 기간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읽었다 하여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남한산성》을 읽은 후 전작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칼의 노래》도 읽게 됐다.

책을 다 읽고 책꽂이에 꽂기 전에 작가의 약력이나 작가의 말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남한산성》을 읽고 뒤적거리다가 소설이 시작되기 전 오른쪽 구석에 일러두기라는 게 눈에 띄었다. 이 책은 소설이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걸 누가 모르나 하며 칼의 노래도 찾아보니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뒤에 구입한 《바람의 화원》을 보니 거기에도 쓰여 있다.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 - 남한산성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 칼의 노래
이 글은 소설이다. - 바람의 화원

그래서 눈에 띄는 《소설 대장경》(조정래, 민족과 문학사, 1991)을 꺼내 앞뒤를 살펴봐도 그런 글은 찾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소설책에 '이 책은 소설이다'라고 일러두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왜 이런 말을 써 놨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인터넷을 떠올려 봤다.

인터넷은 개인이 꿍치고 있던 노하우(know-how)를 무색하게 만든 지 오래다. 지금은 노웨어(know-where)의 시대다. 소유의 종말이 인터넷에서 시작되고 있다. 다양한 정보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얻을 수 있다. 이런 순기능과 함께 정보공해의 삼투압 현상, 즉 사실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를 여과 장치 없이 흡수하는 역기능도 나타나고 있다.

가령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며 사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작가를 향해 악플을 던지는 개인이 있다고 치자. 분명히 출발은 잘못된 시선에서 시작하였지만 악플은 또 다른 악플을 양산하여 눈덩이처럼 커지며 악화가 양화로 둔갑한다. 그래서 《남한산성》과 〈불멸의 이순신〉은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가치 없는 소모적 담론으로 변질되고 끝내는 그것은 틀렸다며 낙인을 찍는다. 소설과 드라마라는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억조차 하질 않는다.

소설은 소설로써 먼저 읽혀야 하고 드라마는 드라마로 먼저 봐줘야 한다. 그 경계를 벗어나 찾아낸 해답은 선천적 기형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으로 급속히 퍼지는 카더라 통신이나 마녀사냥도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이미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기형아로 탈바꿈(變態)하고 결국에는 누군가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만다.

이와 같은 인터넷 역기능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개인의 역량이다. 편집되고 왜곡된 현상을 바르게 볼 줄 아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무수히 널려 있는 데이터를 보며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고 '행간(行間)의 뜻'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 인터넷이다. 그래야 데이터는 비로소 가치를 가진 정보로 다가온다. 인터넷이 넓고 깊어질수록 생각은 좁고 얕게 적응된 나머지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이 되지는 않았나 수시로 자가진단을 하고 피드백을 보내야 할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책 첫머리에 굳이 '이 글은 오로지 소설이다'라고 친절하게(?) 일러두기를 하고 있다. 떼거리로 달려들어 사실이 맞네, 아니네 하는 걸 염려한 작가의 선견지명이거나 무지한 세상에 던지는 사용 설명서는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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