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 나를 대신해 앓고 있는 소설가

김이설
마지막으로 소설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읽긴 읽었는데 내용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백 쪽이 넘는 서양 소설을 읽었던 것도 같고, 매미 소리가 극성을 부릴 때 썩 괜찮은 추리소설을 읽으며 지냈던 것도 같습니다. 책장을 덮는 동시에 모두 휘발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를 않던가, 요즘 자꾸 뭘 잊어먹는 횟수가 늘어나서 그럴지도 모르고요.

여성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편향된 시각이겠지만, 립싱크 같은 소설을 양산하며 여성작가라는 명함을 내미는 이들이 곧잘 눈에 띕니다. 호불호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화려한 표지로 서점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는 소설을 잠깐이라도 들춰보다 휘발성 소설만도 못할 때가 잦아 이내 내려놓곤 합니다.

지난 오월, 뜻밖의 선물로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받았습니다. 뭐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책장을 펼쳤습니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열세 살」을 비롯해 그동안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을 덮을 때쯤 예리한 면도칼에 베인 상처에 소금이 닿은 것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잔인하게 말하고 있었던 거지요. 누구나 해봤음직하거나 목격했음직한 것들이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아 만신창이가 된 주인공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어떤 주인공은 아픔마저 생활이 돼버려 책장을 넘기는 이만 안타깝고 죄스럽게 만들곤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나 하류인생 보다 못 한 더럽고 기구한 밑바닥 '여자'의 삶을 연민은 한 방울도 남지 않게 꼭 짜버리고 덤덤하다 못해 아주 매몰차게 전하는 소설가의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문득,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비로소 그들에게 미안하다. 그들을 위해 오늘 밤도 깨어 소설을 쓴다."는 김이설을 그렇게 만나게 됐습니다.

김이설이 말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더 호되게 앓는' 여자에 관한 긴 소설 《나쁜 피》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나오는 여덟 편의 삶을 적분한 소설이 《나쁜 피》였고, 《나쁜 피》를 미분한 이야기가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자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가족, 행복, 불행, 폭력, 운명, 힘, 고통, 죄스러움과 침묵을 능수능란하게 미분과 적분을 하며 역설적으로 풀어놓습니다. 커다란 목소리로 교훈을 말하거나 이 길로 가야 한다며 잡아끌지도 않습니다.

"소설도 같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부끄러워 죄송하다'고 대표로 말하는 김이설을 만나게 됩니다.

'김이설은 소설 쓰는 사람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습작하면서 남들과 다른 이야기(이설·異說)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요즘 글발이 좋다는 소식을 엿봤습니다. '간만에 문장이 풀려 아침부터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소설가 김이설을 상상합니다. 나를 대신해 앓고 있는 또 다른 주인공들을 만나 부끄러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 인용문은 모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과 《나쁜 피》 작가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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