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최영미

최영미 시인

내 생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정신이 사나워져 시를 잊고 살았다. 길을 가다 번뜩 떠올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멋진 구절이었는데, 나중에 아까워했지만...... 가슴을 두드렸던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되살릴 길 없는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문자 예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느 봄날, 봉긋 올라온 목련송이를 보며 추억이 피어나고 노래가 나를 찾아왔다.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동안은 시를 영영 잃지 않을 게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최영미/이미출판사 20190626 112쪽 10,000원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1

사랑하면 칼날 위에서도 잘 수 있어2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3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가 아니라
여성의 이름으로 우리의 역사를 써야겠다4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나 다시 중심에 섰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원로 시인을 풍자한 〈괴물〉로 문단내 성폭력을 고발했다. 여성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나는 작은 바퀴 하나를 굴렸을 뿐. 그 바퀴 굴리는데 나의 온 힘을 쏟았다." 이제 칼날 위에서 내려와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괴물
  2. 마지막 여름 장미
  3. 독이 묻은 종이
  4. 여성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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