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술을 좋아하지만 을로써 참석하는 영업용 술자리는 거시기합니다. 이럴 땐 갑보다 조금 일찍 가서 자리를 잡고 주방에 계란 후라이 반숙을 인당 두 개씩 부탁합니다. 계란 후라이 반숙을 먹으면 술에 덜 취한다고 해서 갑이 오기 전에 후딱 먹어 치웁니다. 구소련 스파이들이 먹었다는 RU-21도 챙겨 먹기도 했습니다만, 취하는 건 마찬가지더군요.

다음날 해장은 콩나물국밥이나 선지해장국을 먹습니다. 물회에 찬밥이나 국수를 말아 먹거나 잠시 걸어서 점심으로 복국을 먹는 날은 운수 좋은 날입니다. 하지만 해장은 '속이 풀린 것 같은 '기분', 머리가 맑아진 것 같은 '기분', 그걸 느끼게 해주는(87)'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다대기를 풀어 얼큰하게 먹는 해장국은 '통증의 돌려막기(95)'일뿐 잠, 물, 똥을 따라갈 순 없습니다. 세상 어떤 속풀이 음식보다 해장에는 잠, 물, 똥이 최고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약 숙취가 없다면? (...) 즐겁고 맛있고 행복한 천국뿐이므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신나게 마셔댈 거고 그럼 어느 날 진짜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될 것(111)'입니다. 숙취 해소를 위해 해장국을 찾으러 다닐 때가 좋은 시절입니다. '그 어떤 걸 먹고 마시는 것보다 납작 엎으려 있는 게 최고의 해장일 때가 있다는 것을(96)' 느끼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나이가 됐으니까요.

아빠와 순댓국 데이트처럼 대화가 잘 맞고 식성까지 받아주는 사람과 술친구를 하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다음날 기분 좋게 해장 안부까지 물으면 금상첨화이고요. 평양냉면, 양평해장국, 라면, 짬뽕밥, 미역국, 선지해장국도 부족해 세계의 해장음식에 도전하는 저자를 오늘부터 '해장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만두를 엄청 좋아합니다. '전국 만두 대동여지도'가 하루빨리 완성되길 바랍니다.

해장국마저 넘기기 힘든 날 읽으면 문자로 해장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유쾌한 책입니다.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미깡/세미콜론 20200323 180쪽 1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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