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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진정한 혁명이란, 균형을 맞출 때 그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1960년대 성해방 이전에 두 개의 극단적인 이방이 있었지요. 결혼 전에는 결코 섹스를 하면 안 된다는 입장과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오래된 균형을 잃었고, 지나치게 많은 성적 자유를 획득했다고 단순히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지요. 극단에 대한 고유의 기준이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혁명입니다. (31)
  • 스탈린의 끔찍한 말이 생각납니다. "만약 당신이 열 명의 사람을 살해한다면 당신은 살인자이지만, 수백만 명을 죽인다면 당신은 역사적인 영웅이다"라는 패러독스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범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10만 달러를 훔친다면 당신은 도둑이지만, 당신이 수십억 달러를 훔치거나 탕진하면, 분명 정부나 은행이 나서서 도와줄 것입니다. (52)
  • 진정한 사유란 무엇입니까? 사유라는 것의 일차적인 단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정 문제 상황인가", '이것이 문제를 드러내는 올바른 방법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98)
  •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는 첫째, 사람들이 빈곤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둘째로는 사람들이 부정의한 상황을 경험할 때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부정의하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자유가 최소한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작동한다는 것은 부정의한 상황에 대한 자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22)
  • 제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폭력이란 테러리스트의 폭력이 존재하거나 독재적인 정권과도 같은 상황에서, 다소 급진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시민불복종의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적인 법률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듯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자유의 영토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력은 단지 방어적이어야 합니다. (172)
  • 공동선은 저에게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을 의미합니다. 약자를 배제하거나, 상대를 죽이는 방식의 투쟁이 아닙니다. 혹은 총격을 가하는 식의 폭력도 아닙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허약한 지점을 뚫고 가는 것이죠. (195)
  • "우리의 투쟁은 개개의 부패한 개인들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의 권위, 전 지구적 질서와 이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맞서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에 뛰어든다는 것은 "비존재보다 재난이 낫다" 는 바디우의 모토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과 같은 공리적 쾌락주의의 무미건조한 생존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기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진리-사건(Truth-Event)을 향한 충실성에 몸을 던지는 것-비록 충실성이 파국으로 끝난다 할지라도-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모든 긍정적인 기획을 포기하면서, 단지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의식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다.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면, 빈 출신의 유대인 작가 아서 펠트만이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257)
  •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며, 다시 정의내려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근본 구조를 재건해줄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론은 정치를 향한다. 정치의 영토에서 다시 우리는 삶의 기반을 이루는 기술을 재조직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정치는 우리 삶의 양식을 재건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양식을 바꾸는 것, 윤리의 작동 구조를 바꾸는 것, 이것이 혁명이다. (328)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인디고 연구소 기획/궁리 20120228 348쪽 18,000원

지젝은 사람들이 빈곤 상태에 있거나 부정의한 상황을 경험할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도 혁명전야의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자유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지 못하게 만들고 있어서일 게다. 혁명도 멍을 때려야 하는데 자본은 그럴 여유조차 주질 않는다.

누가 지젝을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했는가? 불순하고 급진적인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너무나 온순한 얘기에 실망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