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 가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특별한 삶
- 가족 영화를 만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아무리 귀찮아도 만날 수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가족이다' 그런 실감이 나를 새로운 해방구로 이끈다. (7)
- 내 기억 속 이카이노는 여성들이다. 이카이노에 사는 할머니, 어머니, 며느리, 딸들은 제주도와 경상도, 오사카 사투리로 말했다. 뼈 빠지게 일하고 호탕하게 웃던 그녀들 뒤에는 가혹한 역사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둘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계속 파헤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24)
-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31)
- 지금에 와서야 짐을 싸던 어머니의 미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눈에는 일본에서 온 상자와 봉투를 열어보고 기뻐할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오직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볼 수 없는 가족의 웃는 얼굴을 매일매일 떠올리면서, 그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도록 다음번 소포에 무얼 담을지 궁리했을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씁쓸함을 상상으로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45년 동안 "부모밖에 못 하지"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을까. (43)
- 잠옷 차림으로 진심을 말하는 아버지도,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버지도 모두 나의 아버지였다. (88)
- 새엄마 혜경 씨가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듯했다. 아버지는 열다섯 때 제주도에서 헤어진 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할머니를, 세 오빠들은 오사카에 살면서 물자 공급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를, 올케언니들은 친정어머니를, 선화의 이복형제인 지성과 지흥은 자신을 두고 떠나간 친모와 그 이후 자신들을 키워준 정순 씨를, 선화도 다섯 살 때 사망한 친모 정순 씨를. 이 얼마나 보편적인 노래인가.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면 좋겠다. (124)
- "알았어, 다 받아들일게. 아무튼 열심히 해. 아니, 열심히 하자. 어, 이거 큰일 났네." 카오루는 호탕하게 웃었다. 고맙고 미안하면서 기뻤다.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철커덩, 소리를 내면서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169)
- 어머니와 카오루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함께 장을 봐온 마늘 껍질을 벗기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목격했을 때, 이 장면이 작품의 핵심이 되리라 확신했다. 이데올로기가 달라 서로 탓하고 싸우고 죽이는 세상에서,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밥을 해서 나눠 먹는다는 사실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 생각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와 카오루가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172)
-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하던 어머니는 제주4.3사건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다. 기억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안에는 오랜 세월 봉인해온 기억, 말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할 만큼 비장한 기억도 있었다. 가슴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무거운 돌을 여럿 올려두었던 기억의 뚜껑을 카오루와 내가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족이란 혈연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믿게 되었다.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기능하는 관계성이 있어야 집합체가 비로소 가족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억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비록 당사자는 될 수 없지만, 타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윤곽 정도는 알고 싶다는 겸손한 노력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건과 사실을, 감정과 감상을,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상상과 망상까지도. (175)
- 어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70년만에 다시 제주도를 방문했다. 기억이 희미해진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을 따라 얼핏 떠오르는 한국의 애국가를 더듬거리며 부르는 조선 국적의 어머니. 그 옆에는 부모를 반면교사 삼아 아나키스트로 살고자 하는 한국 국적의 딸과, 북한 정부가 수여한 훈장을 단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사진을 들고 장모님과 아내를 지지하는 일본인 사위가 있다. 4.3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우리 중 누구도 한국의 국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세 사람은 함께 밥을 먹는다. 우리는 가족이다. (195)
- 어쩌면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해온 모든 행위가 기도였던 것이 아닐까. 남편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안아주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깨우고 꾸짖고 칭찬하는 그 모든 것이 기도였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209)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양영희/인예니 역/마음산책 20221025 216쪽 14,500원
〈디어 평양 2005〉 〈굿바이, 평양 2009〉 〈수프와 이데올로기 2021〉는 양영희 감독이 25년에 걸쳐 완성한 '가족 3부작' 다큐멘터리입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를 읽어도 좋고,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봐도 좋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기억과 심정'이 녹아 있습니다. 어머니가 한 모든 것은 가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